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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베이비부머의 인생2막] (13·끝) 인제대 산학협력중점교수 김선엽씨

인생 1막엔 ‘요플레’ 개발… 2막선 ‘미래 인재’ 키웁니다
새롭게 꿈꾸자, 경남Ⅱ

  • 기사입력 : 2015-05-3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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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아침도 요구르트다.”

    김선엽(61)씨는 3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식사로 요구르트를 먹었다.

    처음엔 요구르트만 먹었던 것이 이제는 시리얼에 견과류, 치즈, 우유까지 곁들여 먹을 정도다.

    과거에는 유산균 식품 제조 연구가로서 요구르트를 먹었다면, 이제는 혼자 사는 자취생으로 매일 아침 식사 대용으로 요구르트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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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엽(왼쪽) 인제대학교 산학협력중점교수가 식품생명학과 실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실험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김씨가 자취생활을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서울 토박이인 김씨는 가족을 서울에 남기고 지난 2013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김해로 와 나홀로 삶을 시작했다.

    그가 김해에 와서 하는 일은 식품생명학과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이곳에서 그는 대학 내 산학중점교수로 인생의 2막을 열어젖혔다.



    △떠먹는 요구르트 국내 최초 개발

    대학에서 식품학을 전공한 김씨는 졸업하고 빙그레에 입사했다. 그는 식품 연구원으로 시작해 총무, 인사·노무, 환경위생, 안전, 공장 혁신활동, 마케팅, 영업에 이어 생산담당 임원까지 다방면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가 빙그레에서 일하면서 손에 꼽을 업적을 내놓은 게 있다면 바로 ‘떠먹는 요구르트’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는 것.

    김씨는 지난 1983년 빙그레 식품연구소에서 신제품개발 업무에 몰두, 떠먹는 요구르트인 ‘요플레’를 개발했다.

    “당시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마시는 요구르트만 알고 있었죠. 하지만 이미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는 떠먹는 요구르트가 대세였어요. 회사에서 기회를 줘서 프랑스 등 유럽과 한국을 왔다갔다하며 떠먹는 요구르트 개발에 박차를 가했죠. 이렇게 만들어진 ‘요플레’는 당시 요구르트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계기가 됐어요.”

    요플레의 탄생과 함께 김씨는 회사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연구원에서 공장 전반을 책임지는 공장장까지. 나중에는 그룹 임원까지 올라가 업무를 지휘하기도 했지만, 50대에 접어들자 명예퇴직을 피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언젠가 후배에게 자리를 내주고 길 떠나는 것이 인생 아닌가, 억울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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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대 중반 명예퇴직

    막상 직장을 나오고 보니 김씨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은퇴 후 무엇을 할까? 제대로 생각하고 고민한 적이 없었어요. 그저 회사에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 올인하다 보니 더욱 그럴 여유가 없었죠. 아마도 대부분의 직장인이라면 공감할 것이라 생각해요.”

    한창 일할 나이인 50대 중반. 앞날이 보이질 않았다. 캄캄해도 너무 캄캄했다. 지금까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 직장인으로서 성공이 무엇이고 실패가 무엇인지, 과연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명퇴 후 두 달 동안의 공백은 그의 삶 속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 이후 그는 운 좋게 빙그레 협력 회사의 러브콜을 받아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5년 정도 더 근무할 수 있었지만, 영원하진 못했다.

    “빙그레 협력 회사에 취직해서 5년을 더 근무할 수 있었지만, 회사가 더는 나로부터 얻을 것이 없어질 때쯤 되자 또 나가야만 했죠.”

    그렇지만 김씨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래도 인생에 새로운 길은 열린다”는 신념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제대 산학협력중점교수로 채용

    김씨는 협력회사 은퇴 후에도 쉬지 않았다. 그의 삶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큼 의미 없고 견디기 힘든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자극’을 찾고자 했던 김씨는 2013년 인제대학교 산학협력중점교수 채용문을 두드린다.

    약 7.5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60을 바라볼 만큼 느지막한 나이에 대학 교수가 됐지만, 그의 열정은 대학교 신입생 못지않았다.

    “학생들에게 기업체에 대한 나의 실무경험을 들려준다는 것,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상 그리고 전문성, 올바른 대학생활, 꿈을 심어주고 준비된 예비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지도한다는 것, 그리고 대내외적인 실적과 대학의 평가를 위해 능력껏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보람이죠.”

    김씨는 현재 인제대에서 재학생 수업지도뿐만 아니라 기업체 현장실습, 현장견학, 취업, 기업애로사항 지원 등 주말에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고 있다.

    “주말에도 웬만하면 연구실에 남아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업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서울 집에 가지 못해 가족들로부터 볼멘소리를 듣기도 해요.”

    결혼 이후 수십 년간 해오지 않았던 빨래, 요리, 청소 등 자취생활까지 하면서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한 가지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돈은 그다음 문제죠.”

    이러한 그의 열정과 진심이 통했는지 최근 김씨는 대학으로부터 전임교수로 임용되기에 이른다.

    “30년 인생을 돌아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다음을 준비하기보다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충실하다 보면 기회가 따라온다는 것이었어요. 내 인생의 2막 역시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닌, 평소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들이 축적되고 결국 그것들이 모여 인생 2막의 길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휘훈 기자 24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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