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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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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베이비부머의 인생 2막] 경찰 출신 민간조사원 정지효씨

‘경찰에 대한 애정’으로 새로운 직업 개척 나섰죠

  • 기사입력 : 2015-05-1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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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경찰청 차장 출신 민간조사원 정지효씨가 15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요장리 도로 반사경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망토가 달린 코트에 사냥꾼 모자를 쓰고 한 손엔 파이프, 다른 손에는 돋보기를 든 신사. 누군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 열거된 것들은 모두 코난 도일의 소설에 나오는 ‘셜록 홈즈’의 상징과도 같다. 소설 속에서 셜록 홈즈는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사건, 사고 등을 조사하는 탐정이다. 경찰이나 검찰 수사관과 구별하기 위해 탐정 앞에 ‘사립’을 붙여 부르곤 한다. 외국 소설의 사립탐정은 주로 경찰이 해결하지 못한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특유의 분석력과 남다른 직감, 해박한 지식으로 곧잘 해결하곤 한다.

    어린 시절 소설을 읽어본 아이들이 한번쯤은 꿈꿨을 ‘사립탐정’은 과연 한국에서 실현 가능한 꿈일까. 답은 ‘불가능하다’이다. 탐정이라는 직업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탐정이라는 직함을 내걸고 활동하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대신 이와 유사한 직업이 하나 있다. 바로 ‘민간조사원’.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발표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새로운 직업군 40여개에 포함된 ‘신상’ 직업이다. 이후 국회와 정부는 관련법을 제정해 민간조사업을 합법적인 서비스 산업으로 육성하려고 추진하고 있다.

    일반인에게는 개념조차 생소한 민간조사업. 누군가 닦아 놓은 길보다 오히려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길이 구만리인 새로운 분야에 용감하게 도전장을 던지고 뛰어든 이가 있다. 지난 15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의 한 주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기자에게 명함 한 장부터 건넸다. 명함에는 ‘한국민간조사연구소(KPII) 정지효’라고 쓰여 있다. 직함이 들어갈 자리엔 ‘소장’이나 ‘CEO(최고경영자)’ 대신 ‘Your Best Partner(최고의 사업 파트너)’라고 적혀 있다. 그가 이렇게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정지효(58)씨는 지난해 12월 치안감으로 명예퇴직한 전직 경찰관이다. 1987년 경찰간부후보생 35기로 경찰에 입문한 뒤 대구 대봉파출소장을 시작으로 영등포서장, 경찰청 형사과장, 부산청 제2부장, 경남청 차장과 제1부장 등 경찰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27년간의 경찰 생활 대부분을 수사 형사로 지냈다.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하는 경찰 조직에서 오랜 시간 간부로 지내는 동안 그는 자신도 모르게 권위적인 삶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 퇴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그는 직접 차를 몰고 가던 중 행사로 교통 통제를 하고 있는 의경을 마주했다. 반가운 마음에 그를 불러 “내가 얼마 전까지 경남청 차장이었다”고 하자 그 의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결코 으스대거나 과시하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의경의 표정을 본 순간 그는 비로소 권위가 무용(無用)이 된 ‘전직’ 경찰관인 자신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후로 그는 언행과 행동에 더욱 신경을 썼다. 고급 양복으로 가득 찼던 옷장은 2만원짜리 청바지와 1만원짜리 티셔츠로 채워졌다. 명령조의 어투 대신 ‘감사합니다’와 ‘죄송합니다’가 입에 뱄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명함에는 ‘권위’ 대신 ‘겸손’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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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임을 기점으로 그의 삶 면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단 한 가지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경찰에 대한 애정’이다. 은퇴 이후의 ‘인생 2막’을 설계하는 과정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민간조사업에 뛰어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은퇴 이후 경찰관들의 삶’에 대한 깊은 고민 때문이었다.

    “판·검사는 퇴직 이후에 변호사로 개업하고, 세무직 공무원들은 일반 기업에서 세무나 회계 관련 업무를 계속해서 볼 수 있지만 경찰은 현장에서 30년 가까이 쌓은 노하우를 마땅히 활용할 수 있는 데가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민간조사원은 은퇴 경찰관들이 제2의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한 갈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그가 지난달부터 서울 강남구에 사무실을 두고 운영하고 있는 한국민간조사연구소에는 6명의 직원이 있는데, 사무 업무를 보는 여직원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직 경찰관 출신이다. 이들과 함께 그는 첫 업무로 국내 유명 아웃도어 업체와 계약을 맺고 상표법 위반 사례를 조사하고 있다.

    “직원들 중 일부는 현직에 있을 때 마약 관련 수사를 오랫동안 해온 베테랑들입니다. 소위 ‘짝퉁’의 유통이 마약 반입 경로와 매우 유사한데, 직원들의 노하우가 빛을 발하게 되죠.”

    이제 막 새로운 첫발을 디딘 그에게는 여전히 많은 장애물이 남아있지만, 그는 낙관적인 미래를 꿈꾼다.

    “우리나라는 OECD 가입국 중 탐정 관련 법제가 없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사립탐정 활동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지만 사실상 관리감독이 없는 법적 공백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법 테두리 내에서 민간조사업을 꾸려나가려면 많은 제약이 뒤따르고 할 수 있는 업무도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심부름센터 같은 곳이 음성적으로 성업 중이고, 의뢰인과 피의뢰인에게 사생활 침해 등 피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민간조사업이 법제화가 된다면 국가기관이 개입하기 어려운 개인의 권익 영역을 민간조사업이 담당하고 경찰은 본연의 민생치안 활동에 역량을 집중하게 되면 오히려 업무의 효율성이 높아질 겁니다. 물론 불법 심부름센터로부터의 피해도 막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민간조사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텐데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 연구소라는 명칭에 걸맞게 학술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젊은 시절 첫 발령을 받던 때처럼 눈빛이 반짝이고 들뜬 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은퇴를 앞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십수년 넘게 대접을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막상 밖으로 나와 보니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입니다. 손에 쥐고 누리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밑바닥까지 내려간다는 각오로 새롭게 제 2의 인생을 설계하고 꾸려나가시길 바랍니다.”

    김언진 기자 hop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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