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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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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1) 올드미스 다이어리-30대 여자의 솔직 일기

  • 기사입력 : 2015-03-05 10: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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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작하면서 : 영화를 보고 또는 읽으며 느꼈던 소소한 감상들을 담는다. '일기'인 만큼 개인적인 경험과 느낀 점이 주를 이루지만 글을 읽는 누군가가 공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나는 서른살이 됐다. 2015년 하고도 2달이 지났고 무엇보다 설이 지났으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

    서른살의 직장여성. 예전 대학생일 때는 서른살이 되면 뭔가 전문적이고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쁜 메이크업을 한 후 수트를 입고 출근하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컴퓨터를 하는,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스타일. 회사가 끝나면 남자친구와 멋진 연애도 하고 말이다.

    현실은 어떤가. 화장이 귀찮아 대충 비비크림을 바른 후 안경을 끼고 회사에 간다. 커피는 주로 믹스를 마신다. 그것도 커피 포장지로 휘휘 저어서. 퇴근 후에는 곧바로 집에 간다. 옆자리에 있는 유부녀 회사 선배가 종종 물어본다. "회사 끝나면 뭐하니?" "집에 가는데요…."

    그렇다. 회사를 마치면 집에 간다. 회사 시스템이 바뀌어서 작년까지는 오후 5시에 퇴근했지만 올해부터는 오후 8시에 퇴근한다. 퇴근 시간은 달라졌지만 퇴근 후 집에 가는 것은 똑같다. 일단 연애를 안하고 친구들이 주로 서울에 있으니 만날 사람도 별로 없고(통영에 있는 친구가 가장 가까이 사는 친구다). 이러니 집에 갈 수밖에.

    집-회사를 줄기차게 오가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인가. 회사와 집을 오가는 이런 일상을 반복하다가 늙어가는 것일까. 과연 봄날은 올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울을 보면 얼굴이 10년은 점프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집에 오면 추리닝으로 갈아 입고 텔레비전을 켠다. 재미있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거리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다. 주말은 더욱 특별하지 않다. 한낮까지 늦잠을 잔 뒤 점심을 먹고 컴퓨터를 하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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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여기 또 집구석에서 우울한 삶을 사는 여자가 있다. 최미자, 32살. 그녀는 성우지만 방송국서 고정프로를 못 맡아 집에서 쉬고 있는 사실상의 백수다. 물론 연애도 없다.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키스해본 지 어언 5년'이다.(이 고백 장면이 개인적으로 가장 웃겼고 또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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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오래 자서 허리가 아픈 미자. 꼭 주말 내모습 같다.>

    미자의 할머니는 오후 1시까지 늘어지게 자고 있는 미자에게 말한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여자가 32살이 되면 미쳐도 곱게 미쳐라" 그러고는 미자의 얼굴에 베개를 내던지며 덧붙인다. "밥먹어 이년아! 아이고, 치우고 좀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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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칙칙하고 우울함이 가득한 30대 처녀의 방.>

    이렇게 우울하기만 했던 그녀의 삶에 작은 변화가 찾아온다. 방송국에서 고정프로를 맡게 된 것. 배역은 귀신이다. 두꺼운 대본 중 한참 뒤에 있는 '이히히히히' 라는 소리가 주로 그녀의 몫이다. 이 프로그램의 담당 PD는 일명 '개싸가지'로 통하는 지PD다. 인사를 해도 안받아주고 그녀가 녹음 중 NG라도 내면 "시집이나 가요.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라며 독설을 날린다. 하지만 이 '개싸가지'가 그녀의 삶에 빛과 소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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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베이터 버튼을 입술로 누른 뒤 "뽀뽀해본 지도 참 오래됐네" 라는 자폭성 멘트 후 뻘쭘해 하는 미자.>

    영화 속 지PD는 확실히 판타지다. 어리고 키 크고 잘생겼고, 직업도 학벌도 좋은 남자는 현실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그 남자가 나를 좋아할 확률은 더욱 희박하다.

    반면에 미자는 친구같이 친근한 캐릭터다. 실수도 많고 푼수끼가 넘치지만 그래서 더 정이 가고 내 모습 같다. 친구들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한 지PD의 "내일봐요"란 말에 행간의 의미를 읽으라고 벅벅 우기는 모습이나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뽀뽀한 지도 참 오래됐어요"라고 뜬금없이 고백하는 모습이 그렇다. 좋아하는 사람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혼자서 의미 부여를 하고, 그 사람 앞에서 실수한 후 침대 위에서 하이킥을 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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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심 없으면 둘이 술 마셔주지도 마, 같이 영화보잔 말도 하지마. 그렇게 했으면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해줘야 돼, 그게 예의야!" 지PD에 대한 섭섭함이 폭발한 장면.>

    영화 속 미자는 해피엔딩을 맞았지만 내 삶은 그대로다. 여전히 퇴근을 하면 곧장 집에 오고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좋아하는 예능을 보는 게 가장 큰 낙이다. 예전에 꿈꿨던 엄청 잘나가는 커리어우먼도 아니고 멋진 연애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삶. 때때로 씁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이따금씩 꿈을 꾼다. '나에게도 어쩌면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영화 속 미자의 해피엔딩에 배신감이 아니라 설렘을 느꼈던 건 그런 이유다. 망상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꿈도 꾸지 않으면, 사는 게 너무 재미없고 지루할 테니까. 무미건조한 내 삶에 약간의 생기를 줄 수 있는 그런 설렘이면 충분하다. 이제 곧 봄이 온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조금은 특별한 계절이 되길. 김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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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마지막 장면. 솔직하고 용감한 미자.(부럽다.)>


    <간단 영화 소개>

    2004년부터 2005년까지 1년여 동안 KBS2에서 방영됐던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시트콤 프로듀서를 맡았던 김석윤 PD가 영화감독도 맡았다. 2006년 12월 개봉했다가 팬들의 요청으로 2007년 3월 재개봉했다.

    누런 민무늬 팬티만 입다가 어느날 갑자기 꽃분홍색 팬티를 사 입고 사랑을 꿈꾸는 미자의 둘째 할머니 이야기도 볼거리. 둘째 할머니의 성공적인 로맨스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할머니 3자매도 미자 못지않은 큰 웃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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