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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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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죽지 않겠다" 약속했던 그 사람, 지금은?

잘나가다 부도로 10억 공중에…3만원으로 뻥튀기 팔며 재기
이젠, 당구장 사장님으로 ‘인생 4막’ 엽니다
[창간 69주년 특집- 그때 그 사람] 2003년 1월 9일 “새 삶 살겠다” 경남신문과 약속했던 박현주씨

  • 기사입력 : 2015-03-0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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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주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창원시 의창구 창원대학교 앞의 당구장에서 큐를 손질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기자로 살면서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신문기사는 이기적인 속성을 지녔다고. 복잡한 사안을 입맛대로 단순화시켜 버리고, 누군가의 인생을 달랑 원고지 몇 장에 구겨 넣는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변한다고 했던가. 신문도 변하고 있다. 뒤돌아볼 여유가 생겼고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감도 생겼다. ‘그때 보도했던 그 일은,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 하는 마음으로 12년 전 경남신문을 들춘다. 거기에 ‘그때 그 사람’이 있다.

    그의 이야기는 지난 2003년 1월 9일자 11면 경남신문 ‘굿라이프’라는 코너에 ‘뻥튀기 팔며 새 삶, 희망 찾기’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양손에 뻥튀기 봉지를 들고 도로를 누비는 사진도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는 기사를 통해 경남신문과 독자들에게 ‘죽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약속했다. 12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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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3년 1월 9일자 11면 경남신문 ‘굿라이프’라는 코너에 ‘뻥튀기 팔며 새 삶, 희망 찾기’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2015년 2월, 박현주(57)씨를 다시 찾았을 때 그는 두 손에 뻥튀기 봉지 대신 반질반질 윤이 나는 당구공을 쥐고 있었다. ‘살아온 이야기를 좀 해달라’ 했더니 ‘구차하다’며 손을 내젓는다.

    그의 구차한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경찰서장을 지낸 아버지 슬하에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유치원, 태권도장, 당구장, 독서실 등을 대규모로 운영하며 윤택하게 살았다. 결혼해 아들도 하나 뒀다. 상승세를 몰아 1995년 사채업에 손을 댔다. 외제차를 바꿔 몰아가며 건들건들 건달처럼 살았다. 매일 그의 손을 거쳐 가는 수억원이 무감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생활도 방탕해져 갔다.

    2년 뒤, 세상이 뒤집힌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몰려온 것. 당시 약 1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자산이 공중으로 날아갔고 집 두 채가 은행으로 넘어갔다. 살기 위해 아내와도 갈라섰고 아들과도 남남처럼 살았다. 부모님은 몸져누웠고 그가 신용불량자가 된 모습을 한스럽게 지켜보다 돌아가셨다. 창원시 성산구 불모산동 판잣집에 홀로 살게 됐다. 죽으려고 했으나 살았다. 수중에 남은 3만원으로 뻥튀기를 사서 팔았다. 신문에 나가기로 한 건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의지의 표명이자 마지막 발악이었다.

    보도가 나간 뒤 많은 사람들이 ‘박현주 씨 맞죠? 힘내세요’라며 뻥튀기를 사갔다. 연락이 끊겼던 지인들이 찾아와 하염없이 울다 갔다.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그였는데, 그는 그들이 우는 것을 덤덤하게 지켜봤다. 한창 잘 나가던 때 입속의 혀처럼 굴다 그를 차갑게 외면했던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한 손님이 뻥튀기 한 봉지 달라며 차창을 여는데, 그 친구였죠.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친구가 눈을 피하더라고요. 제가 그랬죠. 나는 이렇게 산다. 너도 잘 살길 바란다.”

    보도 이후 12년. 그는 약속대로 죽지 않았다.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도로를 집 삼아 살았다. 노점상 단속을 피해 다니며 아스팔트 위를 내달렸다.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다 저혈당으로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명절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속도로로 나갔다. 설·추석 꽉 막힌 고속도로는 하루에 100만원씩 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태풍 ‘매미’와 ‘루사’가 왔을 때 이틀 쉬어본 것 말고 휴일은 없었다.

    세상사의 행복과 불행은 제로섬 게임인 것일까. 상습 정체 구간이던 고성 방면, 장유 방면 도로와 터널이 정비되면서 교통이 원활해지자 운전자들은 좋아졌으나 그의 생계는 오히려 어려워졌다. 그래서 근래 3년 동안은 창원대로에 트럭을 세워두고 건빵을 팔았다. 1만원짜리 건빵 포대 하나를 팔면 4000원이 그에게 떨어졌다. 그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최근 창원대 부근의 당구장을 하나 인수했다. 잘 나가던 30대에 당구장 4곳을 운영했던 경험을 되살렸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 그는 목장갑을 끼고 당구공을 닦고 있었다. 살이 조금 빠졌을 뿐, 모습은 12년 전 그대로였다. 허름한 방한 점퍼에 야구모자, 운동화 차림이다. “지난해 11월까지 건빵을 팔았고, 당구장 문을 연 건 한 달도 채 안 됐습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의 반만 고생하자, 이런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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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년 동안 사적인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다. 형편이 나아지자 가족도 다시 만났다. 갈라섰던 아내는 당구장에 나와 일을 돕고, 아들 성훈(34)씨는 연기를 전공해 가음정동에서 학원을 열어 입시생들을 가르친다. 수완이 좋아 제자 여럿을 TV에 출연시켰다. 이제는 세 식구가 가까이서 왕래하며 챙긴다. “재결합할 거냐?” 묻자 그는 고개를 젓는다. “혼자 산 지 20년 가까이 됐어요. 고독이랑 너무 오래 함께하다 보니 이젠 오히려 혼자가 편해요. 아내와도, 아들과도 둘도 없는 친구처럼 지내고, 거기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엔 전에 볼 수 없던 큰 생채기가 나 있다. 이야기를 꺼내려던 그가 ‘숨통이 조인다’며 담배를 문다. 12년 전 보도된 기사에는 ‘조카’가 등장한다. 일찍이 작고한 형에게서 데려다 키운 조카다.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하고 죽으려 할 때 그를 붙잡았던 것도 조카였다. 조카는 “부모 없는 나도 사는데, 왜 삼촌이 죽으려 하느냐”며 울며 매달렸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착한 조카는 그가 말려도 삼촌을 돕겠다며 도로로 나와 함께 뻥튀기를 팔았다.

    하지만 3년 전, 그는 그 착했던 조카와 인연을 끊었다. 성인이 된 조카는 그가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마련한 아파트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송사로 이어졌다. “조카가 선임한 변호사 입에서 삼촌이 어린 조카 앵벌이시켰다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이후로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아파트는 조카가 가져갔습니다. 마지막에 제가 술 한 잔 부어주며 말했어요. 너는 잘 살 거다.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왔기 때문에 더 잘 살 것이다. 너를 잊으려 노력하겠다. 열심히 살아라.”

    인생에 대해 한마디 부탁하자 그는 담백하게 받아쳤다. “내 눈 내가 찔러 고생한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요. 자명한 이치 하나는 깨쳤죠.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 당대에 그 업보 고스란히 받게 된다는 것을요.”

    그리고 부모님 이야기를 했다. “부모님 두 분 다 제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돌아가셨는데….” 그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 ‘부모님께 잘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여유가 있어 당구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장사가 안 되면 그는 또 거리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러나 12년 전처럼 다짐을 받아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이미 ‘희망’이라는 궤도에 잘 안착해 순항 중이었다. 다음번엔 그의 두 손에 뻥튀기, 당구공 말고 무엇이 들려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기대를 안고 기다려도 좋을 듯하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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