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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물/ '친박' 부마민주항쟁 심의위원 황성권씨

“부마항쟁 진상규명에 역사적 책임… 정치적 입장 있을 수 없다”

  • 기사입력 : 2014-10-2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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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민주항쟁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민간 심의위원에 위촉된 황성권씨가 창원시 의창구 용호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부마민주항쟁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부마민주항쟁은 올해로 35년이 지났다. 하지만 35년이 지나도록 부마민주항쟁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의 명예 회복에 대한 구체적인 움직임은 최근 수년간의 일이다. 지난해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 이후 지난 13일에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도 공식 출범했다. 하지만 위원회 구성이 순조롭지는 않다.

    심의위원회 공식 출범과 함께 부마민주항쟁 관련단체들은 위원회의 위원 구성이 ‘친박 인사 편향’이라며 반발했다. 당연직을 제외하고 10명의 민간 심의위원에 포함된 황성권(61)씨는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부마민주항쟁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의 명예 회복을 위한 역할을 해야 할 심의위원은 그만큼 역사적인 책무도 맡고 있기 때문이다.

    황씨는 최근 부마민주항쟁 관련 4개 단체가 성명서를 내고 비판한 데 대해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부마민주항쟁이 제대로 평가받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선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황씨는 부마민주항쟁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해 활동해야 할 마산 출신의 심의위원이다. 우려와 비판에 대해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기억은.

    대학 때 공안당국의 전국 수배명단에 오를 정도의 운동권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한국외대를 다니며 3학년 때 당시 고려대 학생이었던 고(故) 김종철과 1979년 10월 부산에 내려왔다. 종철이와는 학생운동을 하며 서로 하숙집도 자주 드나드는 등 막역한 사이였다. 부산에 내려오게 된 건 시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진 것이 아니라 군입대를 앞두고 징병연기를 위해 부산병무청에 들르기 위한 개인적인 일도 있었다.

    (고 김종철씨는 부마항쟁 당시 시위를 벌이다 마산에서 연행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의 배후조종 인물로 조작하려는 경찰에게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20년간 지역문화의 산실인 마산 문화문고를 운영하면서 민간도서관 ‘책사랑’ 설립을 주도하다 지난 1997년 세상을 떠났다.)

    부산 남포동 지역에 학생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주도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종철이와 내가 유신 철폐 등을 외치며 무리를 주도했다. 부산대학생들은 낯선 사람이 선봉에 나서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누구냐”고 따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위대 중에 마산고 후배들을 발견했고, 마산고 다닐 때 학생회장을 했던 터라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았다. 유신체제라는 게 1인 독재정권인데 이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민주주의 운동은 학생을 빼놓을 수 없었다. 시민들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 낸 것이 부마민주항쟁이다. 다른 시위대와 합류하면서 구호도 앞장서서 외치고 대열도 이끌었다.

    시위대는 수천명으로 늘어 계속 번져 나갔다. 오후 6시쯤 당시 남포동 창신파출소 앞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종철이는 그날 마산으로 넘어가 시위를 이어나갔다. 보안대 지하실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잠을 안 재우고 물고문 등 나를 빨갱이로 몰며 온갖 고문이 자행됐다. 몇날 며칠 계속되는 고문은 10·26사태 이후 중단됐지만 교도소로 이송돼 50여 일간 수감생활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에도 민주화의 봄은 잠깐이었고 군사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타 대학생들과 연합시위를 이어나갔다. 81년에 안양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어머니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다.

    -운동권 이후 정치행보가 있었는데.

    1984년쯤 인맥을 통해 모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들어갔다. 운동권 출신의 정치 입문이 많은 시기였지만 당시 보좌관은 전문화된 직업은 아니었다. 정치 인맥도 쌓을 겸 보좌관 생활을 하다가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해 ‘꼬마 민주당’에 들어가 기획조정실 차장을 맡았다.

    1992년에는 창원갑 국회의원도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맛봤다. 정치 입문에 실패해 어려움도 많았으며, 보증 문제가 잘못돼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고 좌절감도 컸다.

    -심의위원 구성에 대한 비판이 많다.

    심의위원으로 선정돼 영광이고 명예스럽지만 미안한 감정도 든다. 부마민주항쟁이 35년이 지났지만 잊히다시피 하고 젊은 세대는 잘 모른다. 진작에 진상 규명이 이뤄지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했는데, 힘을 기르지 못했다. 나도 책임이 있다.

    최근 부마민주항쟁 관련 4개 단체가 성명서를 내고 심의위원 구성에 대해 비판한 부분은 이해한다. 하지만 소위 ‘친박’이라며 박근혜 대통령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심의위원 자격이 없다고 주장할 것은 아니다. 지난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의 대외협력특보를 맡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적 입장은 부마민주항쟁과는 별개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연좌제 또한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은 별개의 인격체이다. 유신체제에 대한 잘못을 딸이라고 해서 비난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지난 2000년부터 새누리당 당적을 유지하고 있고 당원으로서 지지하는 것뿐이다. 이번에 비판 성명을 낸 부마민주항쟁 관련단체들도 정치적인 배경을 뺀다면 나에 대해서 심의위원으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더라도 심의위원회 구성이 ‘친박인사 편향’으로,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될지 우려가 남는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이 과연 제대로 될 것인지에 대한 부마민주항쟁 관련 단체들의 우려가 큰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심의위원회 첫 회의를 했는데 진상규명에 대한 의견을 명확히 했다. 진상 규명 또한 역사적 기록이다. 현 정권이 그것을 무시하고 입맛에 맞는 가이드라인을 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인 책임이 있다. 표면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이유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마민주항쟁 기념사업 등 분열 양상이 우려된다.

    35년간 지나면서 관련자도 흩어져 있고 단체도 6군데로 분산됐다. 진상 규명과 관련해서 국가유공자법 관철 등 공동 목표는 머리를 맞대고 해냈으면 좋겠다. 모두가 공동으로 할 수 있다면 희생할 각오가 돼 있다. 부마민주항쟁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충분히 평가받아야 한다. 글= 김용훈 기자

    yh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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