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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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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신장 이식 보답” 3만그루 나무 심은 박정수씨

“신장이식으로 새 삶을 준 세상에 나무 심어 보답하죠”

  • 기사입력 : 2014-06-2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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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에서 독림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정수 씨가 함양읍 관동마을 정자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성승건 기자/


    누군가의 신장을 이식받았다. 의사는 5년 정도 더 살 수 있다고 했다. 너무 고마웠다. 모두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선택했다. 농촌에 내려가 아내와 함께 나무를 심고 가꾸겠다고.
    산속 생활 19년째. 건강은 되찾았고, 하나 하나 심어놓은 나무는 3만 그루를 훨씬 넘었다. 나무는 자식새끼처럼 예쁘게 자랐고, 사람들에게 항상 건강을 주는 자식이 자랑스럽다. 그래서 쉬지 않고 새 자식을 심고 있다. 내가 죽어도 100년 후 이 자식들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함양에서 독림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정수(73)씨가 적지 않은 나이에도 산속 600고지를 떠나지 않는 이유이다.
    그는 마음이 따뜻했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사람은 나무를 닮는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베풂이다. 지난 24일 함양군 난평리 관동마을을 찾아갔을 때 박씨가 그랬다.
    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연락을 하자 굳이 마중을 나오겠단다. 집으로 바로 가겠다며 마중을 만류했지만 이내 전화가 끊겼다. 휴대전화기도 집에 놔두고 급하게 마중을 나왔지만 서로 길이 엇갈렸고, 박씨는 마을 입구까지 내려갔다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취재진을 만났다.
    “밥 안 먹었죠?” 첫말이 밥부터 먹잔다. 괜찮다고, 빨리 취재하고 가야 된다고 정중히 거절했지만 박씨는 그러는 게 아니란다. “멀리서 왔는데 밥을 먹어야죠. 여기까지 와서 (대접을) 거절하면 안 되는 거예요. 준비한 것도 없는데 저 밑에 콩잎곰국 잘하는 데 있는데 빨리 갑시다.”
    옷차림은 농사꾼과 다름없고, 손과 얼굴은 거칠 대로 거칠어진 할아버지 박씨는 서울 말씨로 나이 어린 취재진을 꼬박꼬박 존댓말로 대했다. 그러면서 무언가 줄 게 없는 빈손이 부끄러운 듯 그의 얼굴엔 미안한 표정이 가득했다.
    첫 만남 몇 분 만에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마음이 따뜻하구나’ 하고 그의 성품이 읽혔다.
    그는 한때 잘나갔다.
    서울 말씨에서 눈치챘듯 그는 도시사람이었다. 관동마을에서 태어났지만 25살에 서울에 있는 자동차부품공장에 입사해 30년 이상 수도권 생활을 했다. 입사 5년차에 철강공장을 설립해 사장이 됐다. 20년 넘게 회사 대표로 있으면서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모자람 없는 생활을 했다.
    어느 날 신장에 이상이 생겼다. 이식을 받아야 할 정도로. 다행히 기증된 신장이 있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나이 많은 사람의 신장이라 수명은 5년 정도였다. 그래도 고마웠다. 신장 기증자를 몰랐기에 모든 사람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오랫동안 보답하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고심한 끝에 나무를 심기로 했다. 나무는 오랫동안 남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식을 받고 감사했죠. 사는 날까지 은행나무를 심기로 했어요. 내가 죽더라도 나를 대신에 오랫동안 살아 내 못다한 보답을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했죠.”
    불만이 하늘 끝까지 오른 아내를 겨우 설득해 지난 1996년 고향인 관동마을 뒷산 33만㎡를 사들였다. 마을에 연고가 없어 산 중턱에 허름하게 집을 지어 살았다. 전기도, 수도도 없었지만 무작정 살았다. 묘목을 사와 매일매일 아내와 함께 심었다. 편의시설이 전혀 없었지만 600m 고지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음식은 산에서 나는 걸 먹었고, 물은 산에서 내려오는 걸 마셨다.
    그의 나무는 어느덧 3만 그루 이상이 됐다.
    고된 여건 속에서도 매일매일 나무 심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2년생 묘목을 사와서 산에 심고, 그 넓은 잡풀을 제거하기를 19년째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여유가 있을 때마다 방치되고 있는 산을 조금씩 사들였고, 거기에 또 묘목을 심었다. 처음에는 생명력이 좋은 은행나무만 심다 잣나무, 밤나무까지 심었다. 잣나무, 밤나무는 생활비 마련을 겸해서였다. 2001년 함양군으로부터 독림가 인정을 받으면서 그의 나무심기 열정은 더욱 불탔다.
    “5년밖에 못 살 것으로 생각하고 한 일이 벌써 19년이 됐죠. 그동안 심은 나무는 은행나무 1만 그루, 잣나무 2만 그루이고, 산에 흩어져 있는 밤나무는 수량을 알 수 없을 정도이죠. 아직까지 살고 있으니 건강은 덤으로 되찾았죠.”
    33만㎡에 3만 그루가 넘는 나무 관리가 가능할까. 이미 한계를 넘어선 그 일을 박씨와 그의 아내가 하고 있다. 항상 일이 있어 심심하지 않으니 좋고, 산속에 있으니 굶어죽을 걱정이 없어 좋다. 단지 돈을 못 벌어서 조금 아쉬울 뿐이다.
    나무는 수익을 주지 않는다.
    나무를 키우는 데 돈은 많이 들어가지만 돈을 안겨다 주지 않는다. 박씨가 일찌감치 몰랐겠나. “노력은 많이 하는데 대가를 주지 않는 게 나무죠.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를 가꾸지 않죠. 독림가들은 재산세 내고 손해만 보죠. 그런데도 나무를 그냥 놔두는 거예요. 사람들을 위해서….”
    베풂의 신념이 그를 독림가로 붙들고 있다. 숲이 있어야 생명이 있고, 우리가 모를 뿐이지 나무는 모두에게 더 큰 이득을 끊임없이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동기 중에 재산 1000억 넘는 친구가 있어요. 저는 그들에게 오히려 당당하게 대들죠. 표 나는 것은 없지만 저는 쌀 100가마 기부하는 것보다 100배 이상의 기부를 나무를 통해 하고 있으니까. 하하~”
    그는 바람이 하나 있다.
    함양에 제2의 상림숲을 만들고 싶다. 베풂을 위해 나무를 심었지만 100년이 지난 후에라도 자신의 신념을 후대에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박씨는 5년 전 발족한 한국산림경영인협회 함양군협의회서 회장을 3년째 맡고 있다. 군내 독림가 20여명이 참여하는 모임이다. 산림정보를 부지런히 알아가면서 바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조선시대 왕 정조 이산은 말했다.
    “살림을 꾸려나가는 개인 가정에서도 10년 계획으로는 나무를 심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더구나 나라의 만 년을 내다보는 계획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박씨는 군청에 제출한 산림경영계획서 자기소개서에 계획 및 포부를 이렇게 썼다.
    ‘향후 1000년 동안 내가 심어놓은 나무가 국가나 백성에게 훨씬 이익이 클 것이라 자부합니다. 오랫동안 인류에게 효자 노릇을 할 것입니다.’
    마음이 잔잔해진다. 글=김호철 기자 keeper@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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